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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금강산의 역사와 문화유적

금강산의 역사와 문화유적

1. 개관

금강산은 동해 북부의 아름다운 명산 승지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산으로서, 최고봉인 비로봉은 1,638미터를 중심으로 주위가 약 80킬로 미터에 이르며, 강원도의 회양, 통천, 고성, 인제의 4개 군에 걸쳐서 약 1670 평방 키로 미터에 이른다.

금강산 만물상

금강이라는 말은 불교경전인 “화엄경”에 “해동 보살이 사는 금강산이 있다.”라고 적은 데서 연유가 되었다.

금강산의 자연환경은 태백산맥의 분수령을 이루며, 남북으로 뻗쳐있어, 동쪽과 서쪽으로 주봉에서 갈라진 산줄기와 수많은 산봉우리가 솟아있어 “일만 이천 봉”을 이루고 있다.

주봉인 비로봉 북쪽으로 영랑봉, 옥녀봉, 상등봉, 오봉산이 있고, 남쪽은 월출봉, 일출봉, 차일봉, 미륵봉, 백마봉, 호령봉, 국사봉 등이 뻗쳐있다.

2. 역사와 문화유적

금강산은 선사시대의 유물이라는 기록은 없으며, “동국여지승람” 유점사조에 월지 국에서 53불이 쇠북을 타고 이곳 해안에 도착하여 정주한 곳이 유점사의 터였다는 전설뿐이며, 단지, 신라 진덕왕 때, 영지에서 나라의 큰일을 결정할 때, 의논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금강산에는 신라의 마의 태자의 고사는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최후, 경순왕이 고려에 귀속하려고 하자 태자는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으니, 민심을 수습하여 나라의 힘이 다할 때까지 맞을 것이지, 천년사직을 넘겨줄 수 없다.”라고 반대하면서, 통곡을 하며 개골산에 들어가 집을 짓고 베옷과 초식으로 일생을 마쳤다는 기록이 있으며, 태자의 무덤도 전해지고 있다.

금강산의 4대사찰은, 유점사, 신계사, 장안사, 표훈사가 있으며, 이외 크고 작은 절이 많이 있고,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름 있는 큰 사찰은 대부분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중국사신이 올 때마다 반드시 금강산의 “대장경” 속에 금강산 이야기를 보기 위해 들렸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외국인이 금강산유람이 쉽지 않았으나 성종 때 일본 중이 외교사절로 와서 금강산을 한 번 보자고 간청을 하였으나, 조정의 중신 회의에서 외국인이 국토 깊숙이 보는 것은 군사상 불리하다는 이유와 국제 간의 친선이 된다는 주장을 하는 찬반이 양립하였다.

금강산의 유물과 유적은 대부분 사찰들이지만, 간혹 경치 좋은 곳에 옛사람들의 필적이 남아있다.

역사적으로 널리 알려진, 유점사는 금강산에 있는 모든 사찰의 본산이며, 1466년 세조가 유점사에 왔다가 승 학열에게 중건을 명하여 거찰이 되었으며, 법당을 능인전이라 하였으며, 절 앞에 세워진 산영루에는 정인지가 짓고 정난종이 쓴 대 종기가 있다.

전각 안에는 53금불과 각 향목 상천 축산이 있고, 마당에는 13층 석탑은 돌 빛이 푸르고 솜씨가 정교하였으며, 이밖에 패 엽서와 인목대비의 친필 및 정명 공주가 쓴 불경 한 권이 소장되어 있다.

표훈사는 670년 표훈이 창건하였으며, 장안사는 내금강의 거찰로 514년 진표가 창건하고, 정양사는 금강산의 정맥에 위치하고 있어, 그 이름을 정양 사라고, 672년에 회정 선사가 창건하였다.

 

보덕굴은 안폭동 안에 있는 암자로 규모는 크지 않으나 금강산에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 암자는 절벽의 일부를 뚫어서 널쪽을 걸치고 밑에 구리기둥을 세워 그 위에 지었다.

정동이라는 중국사신이 보덕굴을 보고, 참 불계가 여기라하며, 죽어서 다시 조선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불계에서 살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마하연은 신라시대 의상이 창건하고, 월송이 중건한 절이며, 도솔암은 1535년 중종 30년에 금강산 승려인 성희가 창건하였으며, 요사와 극락전을 짓고 불상 7구를 봉안하였다.

금강산은 암석산으로서 경관이 좋아 암석에 글씨를 써서 각자 한 것이 많으며, 그중에 내금강에 만폭동에 있는 양사언의 “봉래 풍악 원화 동천”이라고 쓴 초서가 가장 알려져 있다.

속설에 “만폭동 경관의 값이 천 냥이라면, 그 중에 오백 냥은 양사언의 글씨 값이다.”라는 말이 전할 정도로 유명한 글씨이며, 글씨의 크기는 외금강 구룡폭 절벽에 새겨진 “미륵불”이라는 글씨가 으뜸이다.

금강산 안에 문화유물 중에 일제강정 기에 보물로 지정된 것은 장안사 사성전, 유점사 금동 석가여래입상, 유점사 금동보살입상, 금장암 지사자 삼층석탑, 금장암 지석, 남보현 사지 목조 소 탑 등이다.

우리 민족의 산인 금강산의 일만 이천 봉은 민족적 자랑의 표상이며, 국토애의 원천으로서, 금강산의 봉들이 수려하기 때문에 민족의 영기로서 승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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