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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남이장군의 설화와 신앙

남이(南怡) 장군의 설화와  신앙

1. 생애

남이(南怡)는 1441(세종23)년에 태어나서, 1468(예종 즉위)년에 돌아간, 조선 전기의 무신이며, 그는 영의정부사 재의 손자로서, 부친은 휘이며, 어머니는 태종의 4녀인 정선 공주이다.

그는 1457(세조 3)년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여러 무직을 역임하였으며, 1466년 다시 발 영시에 급제를 하여, 1467년 포천, 영평 등지에서 도적을 토벌하였으며, 이시애 난 때에는 대장으로서 토벌을 하여 당상관에 초계되어 행호 군이 되었으며, 이시애 난의 토벌 공로로 적개공신 1등에 책록 되어 의산군에 봉하여졌다.

그 후, 그는 서북변의 건주위 여진을 토벌하여 우상 대장이 되어 만포로부터 파 저 강을 공격하여, 이만주를 참살한 공로로 이등 군공을 받은 후에 공저 판서가 되었다.

남이장군 동상

1468년 오위도총부도 총관을 겸한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남이가 군사를 장악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는 말을 반대파들이 계속적으로 예종에게 아룀으로써, 병조판서에서 해직되어 겸사복장으로 밀려났다.

1818(순조 18)년 우의정 남공철의 주청으로 관직에 복직되었으나, 그 후, 창녕의 구봉 서원, 서울 용산의 용문사 및 성동의 충민사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무이었다.

그는 28세에 아까운 나이에 그를 시기한 유자광의 흉계에 말려서, 예종 때에 반역 협의로 처형을 당하였다.

2. 남이장군의 설화와 신앙

남이장군의 설화에서는, 그의 출생은 짐승의 원혼이 환상한 것으로써, 인신 공회를 받는 거대한 지네 또는 뱀이 그 폐해를 없애려고 한, 어느 이인에 의하여 퇴치된 뒤에 원수를 갚으려고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스승 또는 아버지를 해치려는 시도 끝에 원한이 해소되었다는 것이다.

결혼은 어린 시절 거리에서 놀다가 어린 종이 작은 보자기에 상자를 들고 가는데, 보자기 위에 귀신이 앉아서 따라가니 권람의 집으로 들어가므로 뒤따라 들어갔다.

남이장군 제사행사

잠시 후에 그 집의 낭자가 갑자기 죽어 집안이 발칵 뒤집어지자, 남이가 들어가서 보니, 낭자의 가슴에 귀신이 타고 앉아 있다가, 남이를 보고 도망을 치자, 다시 낭자가 살아나고, 남이가 나오면 다시 낭자기 죽자, 남이가 본 바를 이야기하고 치료를 하여 낭자를 낮게 하여 권람의 사위가 되었다는 설화이다.

그 후, 민간신앙에서 “남이장군 신”으로 신앙의 대상으로 받들어 오게 되었다.

남이장군의 신앙은 나라를 위하고 용맹을 떨치며 공을 크게 세웠음에도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그의 원혼을 달래기 위하여 신으로 받들게 된 것 같기도 하다.

 

남이장군을 신격화되어 모시는 곳은 서울시 성동구 사근동, 용산구 용문동. 도원동에 사당이 있으며, 정기적 또는 비정기적으로 마을 주민에 의하여 유교식 제사나 무당의 당굿으로 행하여지고 있으나 대개는 유교식 제사를 지내고 있다.

남이장군의 무덤은 강원도 춘성군 남면 방하리에 있는 남이섬에 있어 지금은 관광지가 되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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