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

한국종교의 역사적 전개과정

한국 종교의 역사적 전개과정

1. 개념

종교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되었으며, 종교는 정치, 경제, 사상, 예술, 과학 등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관련되어 절대적이며 궁극적인 가치체계로서 기능을 하였으며, 역사발전단계를 반영하고 있는 구체적인 문화현상이다.

현재 한자어로 쓰고 있는 religion의 번역어로서 종교는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유교 등의 개별 종교들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종교의 관념으로 종교집단을 형성하여 인간이나 자연의 힘을 초월하는 존재를 중심으로 하는 관념체계를 기반으로 교의, 의례, 시설, 조직을 갖춘 사회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의 역사적 발전단계는 민족적, 문화적 전통의 차이에 따라 다양성이 있으나, 광의적인 의미는 신이나 절대자 등 인간과의 관계로 보거나, 신성감이나 외경의 감정 등 종교에서 보이는 특정의 심리상태를 기준으로 하거나, 특정의 가치체계를 갖춘 인간의 생활 활동으로서 정의를 할 수 있다.

2. 한국종교의 역사적 전개

1) 상고시대

고조선 시대로부터 고대 부족 국가의 형성기인 삼국시대의 초기에는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개국 설화 및 시조 신화에 나타나면서 구전으로 내려왔다.

한국 고대 신화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요소는 하늘을 지고 신의 존재로 의식한 점으로서, 단군신화의 환인은 하느님 또는 하늘이라는 하였으며, 단군신화의 형성기에는 하늘에 대한 신앙이 강하였다.

천신은 지상적 내지 초월적 존재로서 인간의 세계에 하강하여 세상을 다스리거나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임무를 실현한다고 하였으며, 천신 자체는 인간으로 성육하지는 않지만, 햇빛, 번대, 붉은 구름 등으로 나타나거나 꿈속에서 나타나 계시한다고 믿었다.

고대 한국인의 신앙의 큰 비중은 태양, 산악, 나무, 숲, 신단 등의 숭배 현상은 천신이나 신이 하강하거나 생명력을 상징하는 신성성을 나타낸다고 인식하였다.

고대 한국인의 신앙은 제의를 통하여 신앙의 내용을 현실 속에서 실천하는 것으로서, 가을에 추수를 미치면 제사를 지냈으며, 고대의 원시 신앙은 현재까지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내오고 있다.

2) 삼국시대

삼국시대는 중국으로부터 불교, 도교 등이 수용됨에 따라 상고대의 원시신앙이

변모하였다.

상고대의 제정일치시대에는 부족의 족장은 사제인 동시에 왕으로서, 신라 초기까지 이어져 왕이 무당이며 무당이 왕이었다.

삼국시대의 무속신앙은 해양문화의 남방적인 성격을 띤, 용의 신앙이 크게 보급되었으며, 천하 대장으로 알려진 대장군이 액과 잡귀를 막는 촌락 수호신의 기능과 경계를 구분하였다.

삼국시대의 무속신앙은 왕권이 불교와 밀착되어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장려를 하자 무속신앙이 차지하는 지위를 불교에 넘겨주었다.

 

무속신앙은 역사의 표면에서보다 사회의 저변에서 한국문화의 행동양식을 결정하는데 구실을 하였다.

삼국시대는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발달과 전제적 왕권이 성장함에 따라 충과 효의 덕망이 요구되었고 사회도덕으로서 유교를 중요시 하여 본격적으로 수용하면서, 고구려 소수림왕 때는 태학을 세우고 태학박사가 귀족의 자녀들에게 오경과 유교의 경전을 가르쳤다.

더욱이 백제는 아직기. 왕인 등이 유교를 일본에 전파할 정도로 유교수준이 높았으며,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파하였으며, 그 뒤에 일본에 오경박사를 자주 보냈다.

3) 고려시대

고려시대는 불교와 유교가 수용되기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무속신앙은 민중의 의식에 전반에 걸쳐 깔려 있었으며, 고려를 창건한 태조는 불교와 함께 무속에 기대어 건국 과업을 수행하였다.

고려사에서는 300건의 국왕이 참석하는 기우행사의식과 곡식의 풍요를 비는 행사, 왕과 귀족의 질병을 치료하는데 무격을 동원하였다고 하였으며, 4대 산인 덕적산, 백악, 송악, 목멱산, 등에 무녀로 하여금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고려시대

의 무속신앙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전하여 내려왔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격신은 분화되어 다양화되면서, 불교, 도교 등의 종교로 혼합되었다.

고려시대의 불교는 호국적인 성격 외에도 현세구복적인 특성이 있었으며, 팔관회 등은 국가와 개인의 현세적 행복을 구하는 성격으로서, 재래의 무속 및 도교 신앙과 결부되었다.

무속신앙과 불교와 혼합되어 왔던 고려시대의 도교는 주로 재앙을 제거하고, 복을 비는 국가적 행사로서, 고려의 역대 왕들과 민중들까지 신봉하였다.

4)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통치구조와 이념은 유교에 의하여 정착시키려는 개혁정책과 불교교리를 배척하였으나, 세조의 왕위찬탈문제로 사육신과 생육신이 출현하면서, 세속적 정치권력에 저항하는 도학 정신 신념이 발생하였다.

조선시대의 유학자의 이상은 덕을 밝혀 백성을 새롭게 함으로써, 도학을 실현시키는 것으로서 유교적 정신을 존중하여 군왕에게도 선비를 특별히 우대할 의무를 부여하였다.

그 후, 유교철학이 심화될 때, 유교의례로서 예학의 관심이 성장하였으며, 퇴계와 율곡의 성리학이 절정에 이루면서, 정구, 김장생 등의 예학파가 이루어졌다.

조선을 창업한 태조는 독실한 불교도로서 대장경 인쇄를 완성하고 조계종의 본사인 홍천사를 세워 왕실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태종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불교 억압정책으로 70개의 사찰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원과 재산을 강력히 제한하고 승려와 사찰소유와 노비의 범위를 한정하였으며, 생육신의 김시습은 유학자로 불교에 입문하여 선과 화엄, 법화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

 

조선시대의 도교는 유교중심으로 조선사회에 들어왔으나, 유신들에 의하여 이단으로 규정되어 그 규모가 크게 축소되었으며, 왕실과 민간에게 도교 신봉이 여전하자 유학자 관료들이 도교의 신전의 폐지를 계속적으로 건의하여 조선왕실에서 송도의 소격전 한 곳만을 남기고 모두 폐쇄하였다.

조선시대의 도교의 특징은, 주로 지식인들 사이에 선봉이 되던 도교인 단학이 성장하면서, 도맥으로 형성하였으며, 해동전도록에는 도범을 전수한 인물과 저서를 소개하였다.

조선 후기 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사회적 혼란으로 유교의 이념은 현실적 적응에서 괴리가 생기게 되었으며, 도학도 현실적 실현에서 폐단이 나타나자 새로운 학풍으로서 경세제민, 실사구시, 이용후생의 실학파가 나타났다.(유형원, 이익, 안정복,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등)

실학파 학자들은 경학, 역사, 지리, 경제 등 다양한 방향의 연구와 저술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며, 이들은 주자 학파의 모순이라는 것보다 방법에서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으나, 실학사상은 정책에서 거의 반영되지 못하고 주자학적 정통성에도 대립세력으로도 성장하지 못하였다.

 

영조와 정조시대로부터 천주교가 유교적 전통사회에 전파되면서, 사회의 문제와 사상적 갈등을 초래하여 유학계와 정부에서도 천주교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탄압을 하였다.

조선의 명문사족이 천주교 신앙에 입교하자 비판과 공격이 집중되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고, 정치적 권력투쟁과 얽혀 천주교 신앙을 배교하여도 형벌을 면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의 봉건질서 속에 억압받던 하층 서민들에게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자 유교적 전통 질서가 위협을 받게 되자 정부는 국법으로 모역 죄에 해당하는 천주 교신도들에게 신유사옥 등 엄격한 탄압을 가하였다.

조선 후기 시대의 민간신앙으로서는 고려 때 성황한 수경 신의 습속이 일부에서 신봉되었고, 세간에 널리 행하여진 칠성신앙이 두드려졌다.

5) 최근세

조선 말기에는 정치의 부패와 각종 재난과 외세의 위협 그리고 종교적으로 유교 질서의 혼란과 천주교가 사회 저변에서 지하운동 활동하는 가운데 현실의 불안과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다.

이에 유교, 불교, 도교 등 기존의 교리를 종합, 보완한 신종교가 출현함으로써, 민중의 좌절과 염원을 흡수, 극복하려고 하였으며, 정감록적인 민간신앙의 구세주 사상과 택지 사상에 영향을 받았으며, 종권의 교주들은 무교적인 체험인의 신명 사상을 논리를 기초한 카리스마적 전능을 가지고 출현하였다.

대표적인 것은, 동학계, 유교계, 불교계, 국조계(단군 신앙), 기타(관운장) 등이었다.

 

1882년 한국에 처음 들어온 개신교의 선교사 귀츨라프 목사는 서해안 일대에 와서 한문 성서와 교리서를 나누어 주며 전도하고 돌아갔으며, 그 후, 1872년 영국의 매킨타이어와 로스 목사가 만주에 와서 이응찬, 백홍준 등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며, 1887년 서상륜이 선교사와 함께 신악 전서를 번역과 간행을 하여 각지에 전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1882년 미국과 수호조약을 맺고 미국 북 장로교 목사 알렌 언더우드와 선교사 아펜젤러가 들어와서 의료 및 선교 사업을 하였으며, 이때에 광혜원이 세워지고, 제중원이 개설되어 서양의술을 통한 선교 사업이 활발하게 되었다.

1885년 배재학당과 예수교 학당이 설립, 1915년 연희전문학교 고등교육기관이 설립, 1887년 아펜젤러는 정동교회를 설립, 1895년 한국인 자력으로 소래교회가 설립되었으며, 이어서 1890년 영국 성공회, 1890년 침례교회, 1898년 캐나다 장로교, 1904년 안식교, 1907년 성결교, 1908년 구세군이 새워졌다.

 

천주교는 1886년 한불 수호조약의 체결 계기로 전교의 자유를 확보하고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1887년 원주에서 비밀히 운영하던 신학교를 서울 용상으로 옮겨 예수 성심 신학원이 되었다.

1890년 서울 약현성당과 명동성당이 건립되고 수도회와 수녀회의 진출로 고아원 병원 등 사회사업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00년 이후 천주교의 폭발적인 교세의 평창기가 되었으며, 일제의 침략 속에서도 민족운동가의 참여와 광복 이후 전쟁과 사회불안 속에서도 교세가 확장되었다.

결국, 한국 종교는 전통문화의 이질성으로 토착화의 문제에서 많은 난관이 있었으나, 종교 활동이 일반화되면서, 현대 한국인은 신앙 속에 광범위한 조직과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

 

'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이장군의 설화와 신앙  (0) 2021.12.03
금강산의 역사와 문화유적  (0) 2021.12.02
남편과 아내의 상관성  (0) 2021.11.19
가족형태의 역사적 변천  (0) 2021.11.17
한국문화의 역사에 관하여  (0) 2021.11.15